
1. 서론
지금까지 1887년 존 로스의 ‘예수성교젼셔’를 시작으로 한국에 수많은 성경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원어에 좀 더 가까운 의미의 추구와 현대어와 거리감이 적은 언어에 대한 필요성이 요구되면서 그에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번역 개정 또한 요구되고 있다. 번역본들을 살펴보면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2000년이라는 시대적, 그리고 문화적인 차이의 한계로 당시의 원문의 세세한 의미까지 전달해야 하는 것을 고려하면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번역은 반드시 필요하며 또 이루어져야만 한다. 성경이 잘못 번역되었을 때의 부정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는 이미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글로벌한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 나라들 간에 문화와 가치관들에 있어서 그 영향력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의 잘못된 성경 번역은 중국 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교회의 선교운동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별히 이러한 중국어 성경의 번역 중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구절로 이사야 49장 12절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시님’을 중국으로 번역하여 중국 내 뿐 아니라 여러 나라의 선교 운동에 여러 논란(백투 예루살렘)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렇듯 성경 번역의 문제로부터 파생된 교회나 선교단체들 내의 종말론적인 소위 ‘백투 예루살렘’과 같은 논란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붉어지고 있고 전반적으로 이러한 논란들을 여러 나라나 단체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교회나 단체들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논란에 대한 그렇다할 해결책이 나오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본론에서 다루겠지만 이러한 이사야 49장 12절 번역의 논란은 자칫 잘못된 종말론으로 이어져 신앙의 큰 해악을 가져다 줄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에 대한 올바른 번역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어야 할 것이며 올바른 해석 위에 건전한 선교운동, 올바른 종말론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종말론의 중요성은 한국 내에서도 충분히 경험적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다미 선교회 시한부 종말론 사건, 홍혜선 선교사 12월 전쟁 예언 등). 그러므로 필자는 본고를 통해 종말론을 이사야 49장 12절의 올바른 해석을 통해 다루고자 한다. 먼저 이사야 49장 12절의 해석에 대한 견해들을 다룰 것이고, 이로부터 파생된 ‘백투 예루살렘 운동’의 정의와 유래를 다룬 후, 이 운동과 ‘시님’의 관계와 함께 운동의 문제점들을 다룬 후 마지막으로 이것으로부터 결론적으로 알 수 있는 종말론을 다룰 것이다.
2. 본론 1) 이사야 49장 12절의 ‘시님’에 대한 다양한 해석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다루기 전에 각 성경마다 ‘시님’에 대한 번역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사 49:12 하반절 ‘개역개정’, ‘개역한글’: 시님 땅에서 오리라
사 49:12 하반절 ‘공동번역’: 시님족의 나라에서도 돌아간다.
사 49:12 하반절 ‘새번역’: 아스완 땅에서도 올 것이다.
사 49:12 하반절 ‘현대인의 성경’: 동서남북 사방에서 몰려들 것이다.
사 49:12 하반절 ‘NIV’ : some from the region of Aswan.
사 49:12 하반절 ‘KJV’, ‘NASB’: And these from the land of Sinim.
사 49:12 하반절 ‘중국어 성경’: 이들은 서쪽에서 왔고, 진나라에서 왔습니다从西方来,这些从秦国来).
위와 같이 이사야 49장 12절의 ‘시님(개역개정 번역)’은 표현 그대로 시님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아스완 땅, 사방, 진나라 등 다양한 단어로 번역된다. 이러한 번역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이는 다음과 같다.
2-1. ‘시님’을 아스완 땅으로 번역한 학자들과 그에 대한 근거
미하엘리스는 ‘시님’을 ‘Sewēnīm’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독백은 사해두루마리의 이사야서에 의해 입증이 된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학자들은 시님은 복수형으로서 정확히 민족적인 기원을 가진 형용사의 복수이기 때문에 그것은 ‘수에네 사람들’로 번역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한다. 여기서 ‘수에네’는 나일 강의 제1분류에 있는 도시로,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누비아의 옛 경계였다. 또한 NIV 배경주석에 의하면 나중에 이곳은 그리스 문헌에서 ‘엘레판틴’으로 기록되며, 현대의 아스완시를 가리킨다.
2-2. ‘시님’을 중국 진나라로 번역한 학자들과 그에 대한 근거
‘시님’을 중국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단체로 ‘인터콥’이 있다. 이 단체의 대표 홍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마지막 시대 중국교회에서 시님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일으키신다. 현재까지는 소수의 선교사들이 마치 산골짜기를 따라 어렵게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듯 했지만 마지막 시대가 되면 허다한 성도들이 일어나 대로를 따라 복음의 행진을 하며, 그리고 이 가운데 마지막 역사를 감당할 주의 백성들은 중국에서 일어날 시님의 군대가 될 것이다. 중국은 마지막 시대의 거룩한 100만 군대로 일어날 것이다. 그는 이렇듯 마지막 때에는 중국 교회가 100만명의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써 ‘순식간’에 마지막 대추수가 중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사 49:12의 ‘시님’을 통해 그의 종말론을 주장한다. 시님을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외에도 많은데, 이러한 해석을 최초로 제안한 사람은 몬타너스였다. 그 뒤에 중국문명의 찬미자로 불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르티니에 의하여 ‘시님’이 중국이라는 설이 공론화 되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님’과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China는 오늘날에도 인도의 범어로는 SINA, 라틴어로 SINA, 이태리어로 CINA 등으로 음역되는데, 그 음역한 China의 자음은 ‘sn’으로 히브리어 ‘시님’ 단수 자음이 ‘sn’으로 China의 자음 음역인 ‘sn’과 같다는 것이다. 둘째, 중국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이스라엘 예언자에게도 중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라센은 “진 왕조 이전부터 중국이라는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주장하며 순임금 통치 때(B.C 1122~1115)부터 중국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셋째, 고고학 자료를 보면 중국에 풍부하고 희귀한 생산품이 있다는 소식이 널리 중동 지역까지 전해졌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영어 단어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재료인 고령토와 도자기를 뜻하는 단어가 china이다. 넷째, 중국에 일찍부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이 유입되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송나라 시대에 유대인들이 서역을 경유하여 중국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북송의 카이펑에 거주하여 카이펑 유대인 또는 ‘이츠러예’인으로 불렸다. 여기서 ‘이츠러예’는 북송 황제가 하사한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음역이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사 49:12의 ‘시님’을 중국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2-3. ‘시님’의 해석에 대한 필자의 주장과 근거
앞서 보았듯이 사 49:12의 ‘시님’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게 나누어진다. 어떤 이들은 중국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지금의 아스완 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사야 49장의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시님’의 역사적 장소보다 열방의 회복이라는 큰 주제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님’의 역사적 장소에 대한 주장은 모두 추측일 뿐이며, 구약 성경에서도 ‘시님’의 다른 용례를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현재까지도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 부분의 말씀은 문명한 메시아의 복음 운동을 보여주는 것을 알 수 있다. 49장에서 말씀하는 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사야 49장은 49-55장의 서론 역할로서, 내용을 살펴보면 거대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당신의 종 이스라엘이 실패한 사역을 다시 회복할 뿐 아니라 언약 백성과 열방 가운데 세우신 그의 구속사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한 종을 선택하신다. 이 종은 메시아로서 그의 존재와 특징은 시온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깨뜨리는 희생과 대속적 죽음에 있다. 이렇듯 49장 전체와, 특별히 그 중 12절은 구속사적 목적을 가진 메시아를 통한 열방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갖고 있다. 이렇듯 본문의 ‘시님’을 놓고 정확한 근거와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특정 지역을 무리하게 주장하는 것보다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시님’을 먼 곳, 북쪽, 서쪽을 포함해서 ‘열방’을 말하며 본문의 의도와 같이 메시아를 통한 시온 백성의 회복이라는 주제에 무게를 두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3. 본론2) ‘백투 예루살렘’의 정의와 사 49:12과의 연관성
위에서도 다루었듯이 이러한 여러 ‘시님’의 무리한 해석을 통해 ‘백투 예루살렘운동’이 태동되었다. 이는 종말론의 한 부분으로서 지금까지도 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주장이다. 먼저 ‘백투 예루살렘’의 정의와 유래는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단순히 이스라엘 국가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민족 집단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함께 복음을 전할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 더불어 사역하기 위한 운동이다. 백투 예루살렘은 1920년대 ‘예루살렘까지 중국 성도들이 복음을 전해서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자’는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며 실제로 서부 지역인 신장 위구르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러 간 ‘예수 가정’이라는 단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이 단체는 1921년 산동성 태안현 마주앙에서 징띠엔잉에 의하여 생겨났는데, 이들은 음식이 담긴 바구니와 생필품을 지니고 걸어서 중국을 횡단하며 복음을 전했다. 백투 예루살렘이 본격화된 것은 ‘백투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편전복음단’에 의해서이다. 현재 이러한 백투 예루살렘을 앞장서서 이끄는 지도자는 미국과 유럽에서 사역하는 윈 형제와 쉬용쩌, 그리고 에녹 왕이다. 특별히 윈 형제는 백투 예루살렘 운동을 통해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서 10만 명의 선교사를 51개국에 보내어 예수의 재림을 앞당기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중국교회의 선교는 백투 예루살렘운동을 중점으로 빠르게 급성장했고, 유래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이전에 중국 교회 선교의 모체가 되는 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백투 예루살렘을 지지하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았다고 주장하는데 그 구절이 바로 이사야 49장 12절인 것이다. 이 운동을 지지하는 자들은 12절에 나오는 ‘시님’을 중국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사 49:12은 백투 예루살렘 운동을 지지하는 강력한 성경적 근거가 되며, 이 구절로 인해 백투 예루살렘 운동을 이어나가야 할 명분과 사명을 갖게 된 셈이다.
4. 본론3)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백투 예루살렘’운동에 대한 위험성
그렇다면 ‘백투 예루살렘’운동이 왜 지금까지 논란이 되며, 이에 대한 의견이 통일이 되지 않는 것인가? 가장 근본적으로 이들의 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는 사 49:12의 ‘시님’을 불충분한 근거들로만 가지고 중국으로 번역하여 ‘백투 예루살렘’이 중국교회 선교의 사명인 것처럼 주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뿐 아니라 백투 예루살렘운동은 시작되는 시점부터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중국 교회의 백투예루살렘 운동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하여 하루 속히 복음을 예루살렘까지 전하자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 49:12의 ‘시님’ 즉 중국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이 예루살렘까지 전해지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는 마 24:14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백투 예루살렘과 연결시킨 것이다. 여기서 골자는 마 24:14의 ‘끝’에 대한 이해이다. 많은 학자들은 14절의 끝은 ‘telos’를 사용하고, 3절의 ‘세상 끝’이 14절에 쓴 단어와는 다른 단어인 ‘sunteleia’를 사용한다는 것을 근거로 3절의 끝을 세상의 종말로, 14절의 끝을 ‘성전 파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14절의 끝을 성전파괴로 해석한다면, 성전 파괴 사건이 온 세상에 복음이 선포된 다음에 올 것임일 말하게 된다. 실제로 바울은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로마제국의 지역들인 아시아와 유럽의 넓은 지역에 복음을 이미 충만하게 선포했다고 선언하고 있다(롬 15:19). 그리고 끝을 3절과 같이 세상 끝이라고 말한다 해도, 이 예언은 세상 끝의 도래와 복음 선포 사이에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구절에는 예루살렘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종말이 온다는 어떠한 단서도 내포하지 않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중국의 백투 예루살렘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은 중국 교회의 백투 예루살렘을 세대주의적 종말론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러한 비판의 문제점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세대주의적 종말론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중국 교회발 백투 예루살렘에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 번에 걸쳐서 일어난다고 주장(첫째는 공중재림, 두 번째는 지상재림)하는데, 이런 두 재림 이후에 이 땅에서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중국 교회발 백투 예루살렘운동에는 이러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몇 가지 문제들이 더 나타나는데 바로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선교의 방향성을 서진선교로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복음이 어떻게 전 세계로 전파되었는지를 살펴본다면 복음의 불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서쪽 방향으로 번져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남부 유럽에서 복음은 중부, 북부, 그리고 서부 유럽으로 퍼져 나갔으며, 이 복음의 불꽃은 또한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지중해 남쪽 연안 국가로 들어가 어거스틴과 터툴리안과 같은 초대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배출해 냈다.”
이처럼 이들은 기본적으로 복음화의 진행방향을 서진선교로 단순화시키고 있다. 그들도 물론 복음화의 진행 방향에 예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곧바로 이어서 복음의 불꽃은 서진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만 본다면 복음의 방향이 사도행전 16장 9절부터 서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모든 선교를 다 기록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또한 선교역사를 보면 서진선교 못지않게 동진선교가 있었다. 초대 교회에 있었던 5대교구 가운데 로마 교회만이 서방교회가 되었고 나머지 4대교구는 동방교회가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 전해졌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서양’의 종교인 듯 생각하기도 하지만, 분명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기원한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수용되고 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정통’교단이 형성되면서, 거기에서 이단으로 몰려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간 교단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그들이 신비체험과 직통계시를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두는 듯한 경향이 있는 점이다. 그들은 이 운동을 성도들의 신비 체험에 기초하고, 이러한 백투 예루살렘 운동이 계시라고 주장한다.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마가 마는 다음과 같이 백투 예루살렘 운동의 탄생 배경을 설명한다.
“5월 23일 아침 우리 선교단의 이름을 두고 금식하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 내 마음에 이 성경 구절을 떠오르게 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나는 주님께 물었다. ‘주님,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오순절 역사 이후로 복음의 통로는 대부분 서쪽 방향으로 퍼져 나갔다.…너는 간쑤성에서 서쪽으로 계속 가서 예루살렘까지 복음을 전하여라. 그리하여 복음의 빛이 어두운 이 세상을 완전히 한 바퀴 돌게 하라.’”
그들은 이러한 마가 마의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계시를 바탕으로 서진 선교를 사명으로 받아들이며, 현재까지 중국 교회의 선교정책으로는 오직 백투 예루살렘 운동밖에는 없다고 할 정도로 올인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 꿈과 환상, 직접 말씀하시는 계시는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일부분은 온건적 계시(말씀, 상황, 양심 등)는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분명한 전제는 말씀 외에 새로운 계시는 끝났으며, 온건적 계시를 받았다 할지라도 말씀에 반드시 근거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진선교를 계시로 삼고 운동의 최종 모토로 삼을만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6. 종합적인 필자의 견해 및 결론
지금까지 이사야 49장 12절에 나오는 ‘시님’의 해석과 그에 따른 백투 예루살렘의 연관성, 그리고 그에 대한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시님’의 ‘중국’이라는 번역은 다양한 논란을 파생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백투 예루살렘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많은 이들에게 지금까지도 마치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서진선교가 예루살렘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종말론을 심겨주고 있다. 그러나 본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운동에는 직통계시를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두는 듯한 주장들, 마 24:14의 잘못된 해석 등과 같은 신학적인 문제를 많이 갖고 있다.
물론 백투 예루살렘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중국으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일어나야 할 것이다. 중국교회에서도 다른 나라들을 포함한 이스라엘을 위한 선교가 활발히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서진선교와 같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주장들은 수용을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운동의 근반이 되는 성경 구절인 사 49:12(‘시님’을 ‘중국’으로 번역)또한 구속사적 목적을 가진 메시아를 통한 열방의 회복이라는 포괄적이고 큰 주제를 갖고 있다. 이 구절을 통해 특정한 한 집단을 지칭해서 예언된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은 해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통해 마 24:14와 같이 종말이 온다는 그들이 주장하는 종말론 또한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성도는 사 49장의 말씀처럼 한 신실하신 종 메시아로 인한 회복을 기대하며 지리적인 땅 끝 뿐 아니라 복음이 여전히 전해지고 있지 않은 우리 주변에 놓인 땅 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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