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르트 신학사상 비판
성경해석론 - <로마서 강해> 1판 서문 4주차 참고

성경해석방법
● 제 1해석 – 역사비평적 방법
● 제 2해석 – 정통주의의 축자 영감설
정통주의의 축자 영감설은 루터나 칼빈 이래로 내려오는 개신교의 전통적 성경관이다. 거기에 비해서 바르트가 신학에서 공부하고 당대의 독일이나 유럽의 학계에 편만해 있던 하나의 해석론은 역사비평적 방법입니다.
자유주의적 해석인 역사비평적 방법은 학문적으로 좋다고 본다. 그리고 이해를 위한 준비, 성경에 대한 이해를 함에 있어서 전이해에 대한 좋은 준비들을 제공한다. 특별히 어떻게 성경의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지 그러한 삶의 정황을 역사적으로 분석을 잘하지만 그런 것은 좋지만 그러나 이것은 영감설을 부인하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주의의 역사비평적 해석은 교회의 강단신학과는 거리가 멀고, 교회의 설교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아무리 여러분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하고 그런 것에서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분들이 목회하는 현장을 가보면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고 기도와 말씀을 강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회는 대부분 다 보수적이고 영적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도 당대의 학문적 분위기는 이렇게 흘렸지만, 그러나 자기의 목회 체험에서 성경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은 강단과는 거리가 멀고, 교회 설교와는 맞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정통주의의 축자 영감설은 어떻게 보았느냐? 이것은 역사적 삶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적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준다는 그런 것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나오게된 당대의 사회나 문화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와 분석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문제는 그 문자 자체의 내제적인 조명에만 머물고 그것이 시대를 향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러한 것은 간과한다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여튼 자기는 굳이 자유주의의 역사적 비평 방법과 전통주의의 축자 영감설을 택하라고 한다면 자기는 자유주의에 입장이 아니라 전통주의의에 속하고 싶다는 바램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은 역사적인 것을 통하여 성경의 영(영원한 영) 안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먼저는, 역사적인 것을 통하여(역사비평적 방법을 사용하여,) 그러면서도 한 역사에 머물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시대에 적용이 되는) 영원한 영, 영이신 성경의 영 안으로 들여다 본다.
역사비평적인 연구를 가지고 하지만, 그러나 성경영감을 인정을하고 그것이 그 시대, 바울의 시대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 모든 사람에게 주는 영원한 메시지라는 것을 읽어보겠다는 것이다.
다른 문장에 보면 바르트는 이런 말을 한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진리를 말했다.”
바울이 그 시대 사람으로서 그 시대의 교회에게 사람들에게 한가지 진리를 말하는 것이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말했다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입장: 역사비평 + 영감설 = 역사비평적 영감설 (역사비판적 영감설)
제 3의 성경해석론을 가지자 양 진영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전통주의에서는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함으로 정통주의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깐 자유주의나 종교사학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에 대한 역사비판적 영감의 결과들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결국 그가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수용한다고 비판을 한다.
반면에, 그와 동시대의 신학자인 ‘불트만’같은 자들은 바르트를 비판하기를 그가 역사비판적 해석에 철저하지 못하다. 다시말하자면 바울같은 경우도 불트만에 의하면 유대교, 헬레니즘 영향이나 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이러한 것에 철저하지 못하고, 갑자기 “모든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주는 진리”만을 찾을려고했다면서 비판을 한다.
성경관
우리는 성경이라고 말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성경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르트에 있어서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은 똑같이 아니하고 더 나아가 바르트는 성경이라는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자주씁니다. 그래서 자기의 신학도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고 말한다.
1. 하나님의 말씀 형태
기독교교의학 -> <교회교의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삼중형태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삼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삼중형태(예수그리스도, 성경, 설교)는 서로 관련되어있고, 밀접한 관계속에 있다고 보고 있다.
1) 예수 그리스도
->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첫 형태
->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계시 (요1:1, 요1:14 계19:13-14) -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하나님의 계시는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결국, 계시를 말한다는 것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구원의 중보자이면서, 계시의 중보자라고 말한다.
-> 그는 구원의 중보자이면서 계시의 중보자
-> 이 계시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한다.
2) 성경
- 선지자와 사도들의 증거 특별히 구약은 메시아를 기대하고있고, 신약은 메시아를 회복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말로써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 구약은 메시야를 기대, 신약은 회고
- 성경은 인간의 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 계시는 정적인(확정되거나 고정정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성경은 이 계시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된다.
3) 설교
설교 외에 기독교의 모든 증거들이 이것에 포함됨(강의, 논문, 성경동화 등)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도구들
2. 세가지 형태들 간의 상호관계
세 가지 형태는 상호 필수적 관계를 맺고 있다
다른 두가지가 없으면 한가지는 존립하지 못한다.
1) 예수그리스도(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오로지 성경을 통해, 그리고 성경에 근거한 교회선포를 통해 만나게 된다.
2) 성경(쓰여진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이고, 그리고 선포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3) 설교(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 제시된 계시 -> 예수그리스도를 앎으로서나, 아니면 계시를 제시하는 성경을 앎으로서 가능해진다.
- 이 세가지 형태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인간을 은혜롭게 만나신다.
☆성경을 강조 < 하나님의 말씀 – 5권의 책
1.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 (1924)
2. 기독교 교의학 개요 1 (1927)
3. 오늘날의 신학적 실존 (1934)
4.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역-13권 (1939)
5. 하나님의 말씀의 주권과 신앙의 결단(1939)
3. 성경의 영감론
1) 바르트는 역사적 기독교의 기본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역사적 기독교의 기본입장 “신구약성경이 그 원본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바르트는 이 점을 비판한다.
2) 비판의 두가지 논거:
(1) 하나님의 자유 – 주권적이시고 절대적 자유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완료된 계시’로 간주된 성경에 구속받을 리 없다. 만일 성경에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완료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이 은폐되지 않는다면, 이제 그 계시는 인간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인간은 그 계시를 어떤 다른 책을 취급하는 것처럼 취급하게 될 것이다.
(2) 계시의 현재성 – 하나님의 계시행위에는 단순과거와 단순미래가 없다.(그에 의하면 이렇게 이렇게 계시하셨다, 말씀하셨다 는 것이 없는 것이고, 앞으로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자유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계시는 늘 현재에 일어난다. 계시는 지금 이 순간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님께서 과거에 말씀하셨다는 것으로만 그것을 계시라고 할 수 없다.
교회 교의학 5권 하나님의 말씀론 – 성경에 대해서 방금 배운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3) 바르트의 생각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기 어렵다. 성경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초월하시기도 하고, 내재하시기도 하는 하나님의 자유성이 상실된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그의 말씀이 되게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성경을 읽다가 성경 전체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경을 읽는 순간에 갑자기 그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깨달음이 오고, 순간적으로 은혜가 되는 구절들 그 순간에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묵상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본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 그것은 말씀이 된다. 그리고 이런 되어짐에서 그것의 임(sein, being)이 있다.
정리: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고, 이때를 두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해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Die Bibel ist Gottes Wort)‘에서 ’ist -> is’는 주석적인 의미이므로 작게 써야 한다.
4) 바르트의 비판
그에 의하면 정통기독교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시하는 것은
1) 마치 ‘종이교황’(papier – Paspst)을 섬기는 격이고,
2) 성경자체가 원하지 않는 일이며
3) 성경에 욕을 돌리는 일이다.
성경은 자체로는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다만 계시에 대한 증거자가 되길 원할 뿐이다.
성경은 직접적 계시가 아니라 간접적 계시일 뿐이다.
그는 성경의 모든 내용에 대해 정통신학이 가지고 있던 직접계시 관련성에 대해 경계한다.
= 그는 성경의 내용이 다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생각지 않았으며, 과학적으로 타당하다고도 간주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오경의 모세저작설부인, 창조에 대한 두가지 기사, 창3장의 역사성 부인(타락을 원역사 Urgeschichte라고 함/ 원자료적인 복음으로서의 마가복음, 바울서신의 일부에 대한 바울저작설부인 등) 등등 성경 고등비평의 결과들을 받아들인다. 역사비평적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 앞에서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뒤로는 역사비평적 방법을 수용하고 있다.
5) 바르트의 계시관, 성경관에 대한 비판
(1) 성경이 완료된 계시라고 해도 하나님의 자유와 충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하나님의 속성- 변하지 않으시는) 스스로가 변하고 싶을 때는 충돌하겠지만, 하나님은 그 뜻과 섭리에서 불변하시고 한결같으시다.
(2) 계시는 역사가운데서 펼쳐지기에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역사성은 실증성을 보여주고, 실증성은 역사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진리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계시가 현재뿐이라면 그것은 축적되지 않는 순간적인 것에 불과해진다.
♥ 역사적인 것은 어느 경전에도 나와있지 않다. 왜냐하면 불경이나 유교의 경전이나, 동양의 철학 같은 것은 전부다 인간의 깨달음의 사물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 머릿속에서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관념의 직접체이다. 관념의 사물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역사는 관념성이 있는 것이아니라 실증성을 지니고 있다. 실증성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을 통해서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 결국에는 진리라는 것이고 사실이라는 것이다.
-> 계시가 바르트의 주장대로라면 현재뿐이라면 그것은 전혀 축적되지않고, 찰라적인 것이고 순간적인 것이 될 것이다.
(3)성경의 어떤 부분이나 구절에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순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그 밖의 것은 말씀이나 계시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권위를 각자의 주관적 판단에 맡기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리고 주관적인 느낌이나 개인적인 반응에 말씀으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부여하느 것으로 귀결된다.
->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된다.
(4) 성경은 기록된 그대로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은혜를 받았던지 못받았던지 그것은 개인의 문제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성경자체가 여러 곳에서 스스로 증거하는 바이다. 성경은 그 자체가 ‘기록된’ 말씀이요, 인간에게 주어진 완료된(더하거나 뺄수 없는) 하나님의 계시 말씀이라고 한다.
Cf. -로고스(logos)와 레마(rema)
기록된 말씀은 로고스인데 이 말씀이 증거를 통해서 레마로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레마 선교회가 있었는데, 이것은 목회자들이 신학적인 배경을 잘 몰라서 주장하는 것인데,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자체가 대단히 바르트적인 접근이다. 로고스와 레마를 주장하는 것은 다시말씀드리자면 1,2,3 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은혜를 받든지 못받든지 / 나의 영성이 부족해서 못 깨닫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지만 내가 깨닫든지 못깨닫지 간에 말씀은 말씀이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레마를 계속해서 구분한다면, 레마가 진짜 말씀이고 나머지 로고스는 진짜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접근은 전통적인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 모든 말씀은 동일한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계시이다.
Barth의 경구
▶“내가 신학자, 그리고 정치가로서 하는 마지막 말은 은혜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이름 뿐이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학적 작업의 첫 번째, 그리고 기본적인 활동은 기도이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지 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신론과 기독론
1. 3위이체론: 교의학 초두에서 다룸
성부 – 계시자
성자 – 계시
성령 – 계시되어진 것 (cf. 어거스틴, 칼빈 “내적-성령; 외적-성경)
-삼위의 양태를 드러내 보임
-양태론(modalism) 또는 양태적 단일신론(Monarchianims) 또는 Sabellianism(Sabellius)
: “하나님은 한 분. 세가지 양태 내지는 모양으로 나타남. 성부는 성자에게 계승; 성자는 성령에게 계승(계승설).”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시대별로 세 가지 양태 또는 모양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결국 성부가 역할한뒤에는 성자의 역할로 나타나셨고, 성자역할을 한뒤에는 성령의 형태로 계승되었다는 주장.
이것에 따르면 성자의 고난은 바로 성부의 고난이 되므로 ‘성부고난설’(patripssionism)이라고도 함.
삼위일체론 성경에 나오는 말씀에 기초해서 한분이면서 삼위다.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데, 특별히 성령님의 사역은 지금 우리 가운데에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살게 하면서, 우리를 지금도 주관하시고, 간섭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두고, 판단을 할 때에도 결국에는 칼빈과 어거스틴이 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칼빈과 어거스틴은 “신령한 진리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길은 두가지 기준을 통해서 가능하다. 내적 – 성령 / 외적-성경 ” 그래서 항시 우리의 이성을 가지고 삼위일체 문제나 다양한 문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데까지 말하고, 성경이 서는데 서고, 머무는데 머무는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 결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은 외적 기준이고, 우리안에서 성령님께서 우리가 읽을 때 깨닫게 하시니 이러한 방식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안에 말씀하신 성령님이 계신다고 하더라도 그 성령님은 반드시 성경과 동떨어지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라고 했다. 그렇게 말씀함에도 성령님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그 말씀을 풀이해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기 때문에, 성경이라고 할 때 성령님의 영감과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포함하고 있다.
-> 바르트가 말하고 있는 삼위일체론은 전통적인 양태론과 다르지만, 계시를 주심을 독특하게 주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하나님의 하나님되심(<로마서강해>)
자유주의자(19세기 리츨주의자):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이고, 그렇게 나타나심(인간의 주도권)
바르트: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며,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면 인간은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독특한 방식으로 특별계시의 방식으로 나타남(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과 인간의 간격이 강조되다가 ‘교회교의학’ 에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 화해의 성립이 이루어진다.
3. 하나님의 인간되심(<교회교의학>)
►하나님은 저 멀리 초월해 계시는 절대타자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상대자가 되시고 인간과 만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 –예수그리스도 사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과 화해하시는 이 그리스도사건은 하나님의 자유롭고도 은혜로운 행위이다.
►그는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사건 만은 ‘객관적 계시사건’이라고 한다.
-> 슐라이어마허(감정신학)와 키에르케골(실존주의)의 주장에 대한 반론
►(1)Schleiermacher의 감정의 신학(<종교에 관하여> - 익명으로 출판, 하나님 대신에 우주, 무한자, 해석학 창시자) 종교라는 것은 주관적인 문제다.
경건주의(가슴의신학), 낭만주의 영향- <Athaneum 아테네움> 개인적, 주관적 정서에 따른 감정의 신학에 대한 반론
►(2)Kierkegaard의 주관적 실존주의에 대한 반론
다른 것은 다 주관적인 것인데, 한 가지 사건 그리스도사건 만은 ‘객관적 계시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안에 나타나는 인간과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신학의 핵심열쇠; 그것을 다루는 기독론이 모든 신학의 근간 (cf. Cur Deus Homo(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나?) – 안셀무스 -> 만족설을 주장, 속죄론 -> 칼빈과 바르트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과의 차이는 그의 기독론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에서 인간론으로, 하나님의 계시에서 인간에게로 내려온 점임. (자유주의신학- 리츨주의; 하르낙의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제들은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다 사라져 버리고, 결국에는 인간과 인간의 윤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러한 하나님 나라 밖에 다루지 못한다.
평가
: 신론에서 바르트는 한편으로는 자유주의 신학 한편으로는 경건주의 슐라이어마허의 감정의 신학을 극복을 하면서 하나님은 하나님되심 인간은 인간됨을 말한다.
그 하나님께서 초월의 장막에서 내려오셔서 인간과 만나는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인데, 그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안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4.기독론의 3중구조
1) 자기를 낮추시고 화해하시는 하나님(성육신) = 종으로서의 주 – 대제사장
2) (구속을 이루시고)하나님에 의해 높여지고 그래서 화해한 인간 = 주로서의 종 – 왕
3) 1)과 2)의 통일성 속에서 우리의 화해의 보증과 증인 = 선지자
화해론 등
예수 그리스도의 세가지 직무에 따른 여러 교리적 문제에 대한 세가지 특징
예수그리스도: 대제사장 – 왕 – 선지자
화해의 사건: 칭의(의롭다 하시는) – 성화(거룩하게하시는) - 소명(부르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는 소명)
죄의 본질: 교만(<->겸손) – 태만(<->왕으로 살지 않고) – 기만(<->옳은 말씀을 선포)
특별히 ‘교만’은 죄성의 가장 첫 본질이다. 왜냐하면 바르트와 같은 신학자들은 죄를 설명할 때 인간이 피조물인데, 피조물 답게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자기를 만든 창조주를 인정하면서 종속적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하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cf. 어거스틴: 지상나라 – 자기사랑(하나님사랑과 대조))
4. 성령사역: 모음(공동체를 회집하는 것, 에클레시아) – 세움(공동체가 세워져야한다.) – 보냄(파송)
5. 그리스도인의 실존: 믿음 – 사랑 – 소망
6. 윤리의 세가지 차원: 기독론 – 죄론 – 성령론
기타 신학사상
죄론: 창 3장의 타락장의 역사적 사실부인. 그러나 원죄인정. 원죄는 인간이 스스로 피조물임을 인정하지(교만) 않고 창조주로 간주한 것. 자기중심적 심연 속으로 빠짐.
예정론: 칼빈처럼 이중예정론을 말하나 근본적인 차이.(칼빈, 어거스틴의 이중 예정론 –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인류의 일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유기된 이들로 예정하심)
바르트는 ‘모든 인간이 예수없이는 버림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선택되었다’고 함. -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하게 선택된 인간이요, 버림받은 인간.. 그가 모든 인간을 대리 함 .. 따라서 그로인해 어떤 인간도 버림받지 않았음..(어거스틴 – 펠리기우스파)
종말론: 시간의 끝으로서의 종말부인함(<죽은자의 부활> 1926). 종말은 수직적으로 위에서부터 내려와 시간에 부딪히면서도 시간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초월적인 것으로 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그분만이 주이시오, 그분이 승리자라는 점이 모든 이들의 눈에 명백해질 때, 그것이 재림이다.
바르트 신학 비평
긍정적 측면
자유신학의 내재주의적인 관점을 극복하고 배격함(자유주의 신학 –Kant영향으로 종교를 윤리로 환원)
신학의 소스와 기준,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취함
중세-1)권위(교권)
2)이성- 아리스토텔레스 영향-> 변증법 롬바르두스<명제집> 0, 아벨라르두스 X
3)명상- 성 버나드
4)근세 – 이성(헤겔), 감성(슐라이어마허), 의지(자유주의신학)
3.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통신학의 주제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현대적
의미를 찾으려함
4.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유일성을 주창하고 다른 것은 배격하려고 함
부정적 측면
자유주의의 신학의 정신과 여러 전제들을 수용함 (하르낙- 기독교의 본질은 헬라철학의 도입으로 변질;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가르친 복음 – 하나님의 사랑, 부성애, 형제애)
-> 인간이 심각한 원죄아래있고 십자가의 공로가 없이는 이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죄 청산이 되지 않고, 그를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서로 사랑하면 된다라는 것이 전부라고 보고 있다.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정신인데, 이것을 바르트가 도입하고 있다. 결국에는 그의 이해정서는 예수님을 통해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이런 만인구원설적인 입장이다.
심판이 없는 은총을 강조하게 된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계시말씀으로 보지 않음.
(cf. 알렉산드리아학파- 상징적, 풍유적해석; 안디옥- 문자적해석)
3. 역사비평적 영감설로 성경의 많은 내용을 부인함
4. 기독교의 전통교리들(예정론, 종말,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천국과 지옥의 실재성)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거부함
5. 만인구원설적인 입장; 심판없는 은총만 강조
6. 일반은총의 내용들을 너무 배격함
7.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종교개혁적 신학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일종의 관념론적 신학을 창달
종합적 비판
평가: “개신교의 Thomas Aquinas”
“20세기의 교부”
“신학적 교황”
2. 네덜란드 자유대학- 아브라함 카이퍼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을 수용함으로 전통주의에서 멀어졌다.
3. 바르트주의에 예리하게 비판한 미국의 웨스터민스터 신학 변증학 교수 코넬리우스 벤 틸
“바르트주의는 고등인본주의적이다.” 성경중심적이 아니라 인간 논리에 의한 것이다.라고 비판
4. 폴만 <Barth>
“칼빈의 성경신학이 기독교 교회에 오랫동안 살아있을 것이다. 바르트의 위력적인 신학적 제해가 과거로 사라지고 난 후에도 칼빈이 주장한 성경적 신학은 오래동안 살아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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