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화해, 공존: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왜 소통, 화해 그리고 공존이 이전 담론의 화두가 되어 왔고, 여전히 되고 있는가?
아마도 인류가 골 깊은 불통과 갈등의 시대를 지나왔고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공신학이 종종 다루는 이 세 주제는 서로 어떤 연관이 있는가? 소통을 통해서 화해가 이루어지고 결국 공존이 가능하므로, 앞선 것은 원인, 뒤따르는 것은 결과로 상호 연결된다.
기독교와 교회 안에도 소통, 화해 그리고 공존이 그리 원활하지 않다.
그런데 왜 소통과 화해와 공존을 성경 가운데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찾을 필요가 있는가? 이 두 서신은 교회를 향한 박해와 갈등이 심각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베드로와 요한은 로마 제국과 불신 유대인이라는 반복음적인 외부 세력이 가하는 박해에 직면한 초대 교회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하며 공존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준다.
이 글의 목적은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소통, 화해, 공존을 차례대로 살피고 한국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다.
1.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소통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터키의 서부지역에 있던 초대교회에게 보낸 회람 편지다. 따라서 한 통의 회람 서신이 보여주는 것은 베드로와 본도, 갑바도기아, 소아시아, 비두니아 교회 사이에 원활한 소통이 있었다는 사실과, 넓은 지역의 수신자들 사이에도 소통이 있었다는 점이다. 수신자들이 유대인 출신과 헬라인 출신으로 혼합되었지만 소통에 지장이 없었다. 또한 수신자들은 다양한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신 주인 아래에서 어려움을 당하던 노예들, 불신 남편을 둔 부녀들, 남편들, 장로들, 젊은이들, 초신자들, 수신자의 다양한 인종과 신분의 구별이 소통을 가로막지 못했다.
베드로전서 2:19는 ‘세상에 흩어 뿌려진 말씀의 씨’인 그리스도인이 불의로 가득한 세상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 중요한 방법을 소개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한 양심’ 곧 복음으로 거듭난 양심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도 안에 새롭게 된 양심은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도 희미하게나마 가지고 있는 양심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이다. 바로 이 선한 양심 곧 새로운 가치관에서 선한 행실이 나오는데, 선한 양심과 행실로부터 불신자들이 빛을 본다.
베드로는 3:15에서도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다룬다. 15절을 감싸는 13절의 선을 행함과 16절의 선한 행함과 17절의 선을 행함을 고려해 본다면,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닮아가는 선한 양심과 행실로 세상과 소통하라고 권면한다.
1.1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소통
계시록에서 소통의 방식은 몇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삼위 하나님 사이의 소통은 하늘의 보좌를 중심으로 원만한데, 성자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성도는 성부와 성령을 믿고 인식한다. 2. 삼위 하나님과 하늘의 보좌 주위의 4생물과 24장로의 소통도 원만한데, 창세기에서 성막/성전 제사를 미리 보여주는 에덴 동산 주제가 새 에덴의 회복 이미지로 나타나는 신천신지에서 성취된다. 3. 어린양과 신부의 소통은 결혼 관계로 나타난다.
2.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화해
2.1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화해
베드로는 사람이 금이나 은이 아니라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피로 화해와 대속이 가능하다고 밝힌다. 즉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 사이의 화해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화해는 갈등이나 폭력을 전제한다. 개인 사이을 넘어선 큰 차원에서 볼 때 화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라는 기독론적 차원, 그리스도 안에서 이질적 인종과 계층이 하나가 되는 교회론적 차원, 하늘과 땅의 만유가 만유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우주적 차원이 있다. 참된 화해는 갈등과 폭력을 해결하는 전략이라기보다는 그런 악한 상황 속에서 화해의 은총을 입은 그리스도인이 고통을 감내하며 사는 영성의 실천이다.
3.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공존
3.1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공존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던 성도가 불신 세상 속에서 거류민과 나그네같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거룩한 행실로써 인내해야 했다.
공존은 성도가 세상과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거류민과 나그네로서 구별되게 사는 거룩의 실천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거류민과 나그네는 천성을 향해서 순례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은유적 의미를 가지지만, 1세기 성도가 이 땅에서 가난과 곤경과 박해를 겪는다는 실제적 의미를 배제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사회 안에 거하는 것은 불신자와 공존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를 하나님 나라로 변혁하기 위한 공존이다. 따라서 공존은 조화가 아니라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 실제로 베드로는 그 당시 가치관이나 신념을 반박하고 도전하는데, 이 경우 공존이 불가능하다.
베드로는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부르시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세상 속으로’ 교회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비중 있게 다룬다. 특히 ‘세상 속으로 부르심을 받아 공존해야 하는 교회’라는 주제로 다루는 베드로전서 2:18-3:12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는 인클루시오 구조를 보인다. 불의한 고난을 인내하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와 화해를 한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소통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화해와 소통을 경험한 사람만 세상 속에서 의로운 고난을 당하면서도 세상 변혁을 위한 공존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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