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낸시 피어시, 『완전한 진리』 (Nancy R. Pearcey, Total Truth, Wheaton, IL: Crossway Books, 2004)
들어가면서
저자인 낸시 피어시(Nancy R.Pearcey)는 전체 4부로 구성된 자신의 저서 ‘완전한 진리’에서 무너진 성경적 세계관의 실태를 고발한다. 오늘날 십대와 이십대는 의사결정 과정을 지도할 초월적인 도덕적 진리와 표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문화 속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지성 세계도 보편적인 도덕법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옭고 그름을 결정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이와같은 상황 속에서 법률마저 도덕적 여론을 강제하던 입장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흔히 우리가 받아들이는 세계관이 사실상 두 조각난 세계관에 불과하므로 교회는 진리를 거슬리는 문화 속에서 어떻게 각자 주어진 삶의 영역에서 진리를 구현하며 성경적 세계관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지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성경적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1) 성경적 세계관의 정의
성경적 세계관이란 문자 그대로 ‘세계에 대한 관점이자 성경에 입각해서 모든 실재를 보는 관점’ 아우르는 말이다. 세계관은 세계를 잘 항해하는 법을 알려주는 마음의 지도와 같은 것이라서 하나님의 객관적 진리를 각자의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이라는 단어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a Dooyeweerd) 같은 화란 신칼뱅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기독교 진영에 소개되었다. 그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몸 담고 있는 시대의 정신에 맞서려면 그만큼 포괄적이면서 그것이 특정한 문화의 상대주의적인 신념에 불과하는 것이 아닌 성경적 세계관, 즉 독특한 기독교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인생관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성경적 세계관 정립 필요성
현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지식 세계를 확고히 해야만 하는 이유는 분열된 지성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인 세계관을 정립하지 못한체 국가나 사회 속에 침투한 사실-가치, 공-사의 이분법으로 나눠진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단지 종교적 영역에 국한시킨 채 자신이 속한 전문 영역이나 사회집단에서 유행하는 견해를 따라 살아가고 있다. 이와같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두고 해리 블래마이어즈(Harry Blamires)는 자신의 저서인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The Christian Mind)’에서 “기독교적 지성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활동하는 정치영역, 혹은 사회적 관계 ,직장에서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표현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의식적으로 그 학문에 대한 성경적 접근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무의식적으로 다른 철학적 접근을 받아들이게 될 위험이 있다.
세계를 해석하는 일련의 사상은 용어와 개념들로 채워진 철학적 도구 상자와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나름의 분석 도구를 개발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어떤 이슈가 생길 때 다른 사람의 도구를 빌려오게 될 것이다. 그쪽 전문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소용되는 개념이나 문화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면 무엇이든 차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세계관을 확립한다는 것은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것”(thinking Christianly)으로서 기독교가 실재 전체에 관한 진리를 제공한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3) 성경적 세계관의 이해
성경적 세계관은 그리스도인들이 접하는 모든 이슈에 대하여 사용할 수 있는 성경에 기초한 개념적인 도구를 제공해준다. 또한 무엇보다 영적 문제뿐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성경적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와같은 성경적 도구를 알고 사용하기 위해서 창조, 타락, 구속의 관점에서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1:1)의 말씀은 하나님이 창조질서의 전체의 유일한 근원임을 가르친다. 어떤 신도 하나님의 경쟁 상대가 될 수가 없고, 어떤 자연의 힘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떤 것도 그 본성이나 존재를 다른 근원에서 찾을 수 없다. 모든 학문의 근원, 인간 본성에 관한 법칙의 근원도 역시 하나님이시다. 또한 철학적인 지식이나 영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이든 중립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편 기사는 “만물이 주의 종”(시119:91)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타락
창조적 보편적 성격은 타락의 보편성과 이어진다. 성경은 창조세계의 인간의 지성을 포함해 창조주에 대한 거대한 반역과 연관되었다고 말한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타락의 ‘인지적’(noetic) 영향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고후4:4) 지각을 ‘어둡게’ 한다(엡4:18).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불신자가 옳고 그리스도인이 그릇될 수 있지만 불신자가 이룩한 전반적인 사고체계는 성경적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다른 궁극적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결국 그릇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각 분야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은 비판적 성격과 건설적 성격을 둘 다 지닐 필요가 있다.
구속
구속은 창조와 타락만큼 포괄적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혼뿐만 아니라 전 인격체를 구속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구속을 통해서 새롭게 하심을 받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새 생명안에서 생각, 감정, 의지, 습관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새로운 방향을 가지게 된다. 성경적 세계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구속될 때 삶에 대한 관점 전체가 하나님 중심으로 재조정되고, 그분의 계시된 진리 위에 다시 세워진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삶(성화)과 소명의 영역(문화적 갱신) 모두에서 은혜에 힘입어 일생에 걸친 성장의 과정이 시작한다는 뜻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이 창조세계와 연속성을 지닐 것이다.
3) 성경적 세계관 실천 방법
(1) 문화적 명령 이해하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는가? 그 핵심방법은 창1:26-28절에 나오는 창조목적에서 찾아야 한다. 세상에 죄가 들어옴으로 인간은 창조 목적에서 벗어나 길을 잃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고 창조 목적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바른 길로 되돌아가 본래의 목적을 되찾게 된다.
창1장 하나님의 인간 창조목적을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신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사회적 세계(가정, 교회, 학교, 도시, 장보, 법 등)를 개발하라는 의미이고, “땅을 정복하라‘는 자연세계(곡식재배, 다리건설, 컴퓨터를 설계하고 음악을 작곡하는 등의 활동 등)를 대상으로 일하는 뜻이다. 이것을 두고 교회는 ’문화 명령‘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창조목적이 다름 아닌 문화를 창조하고 문명을 건설하는 일임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길은 바로 창조적인 존재가 되고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다. 문화 명령은 타락으로 인해 폐기되지 않는다. 죄는 인간 본성의 모든 측면을 오염시켰으나, 불신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학교를 시작하고 사업을 경영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의 타락은 본래의 소명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렵게 만들었을 뿐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우리의 직업을 하나님의 ’가면‘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인간이란 수단을 통해 보이지 않게 창조세계를 보살피시는 방식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요 하나님의 눈이자 하나님의 발이 된다는 의미이다. 성경적 세계관이 진리임을 발견한 다음에는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천이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모든 힘- 실질적, 지적, 정서적, 예술적-을 그분께 드린다는 의미다. 성경의 진리가 그리스도인의 내면을 붙들게 되면 성/속의 분리란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을 이해했다면 개인적 차원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나쁜 세계관을 몰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좋은 세계관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문화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문화를 창조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주신 과업이며, 우리는 성화과정에서 그 과업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2) 문화적 명령 실천 사례
쉐퍼는 강연과 저술을 통해 균형 잡힌 접근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예를들면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작품을 설명할 때 그 속에 표현된 자율적 인본주의라는 르네상스의 세계관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이 지닌 예술적 가치에 주목하게 하였다.
데이비드 라슨(David Larson)은 프로이트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보편적 강박 신경증“으로 선언한 이래, 종교가 정신 건강에 해로울뿐더러 심지어 병적인 것이라는 오랜 정설을 뒤집었다. 그는 오랜 연구결과 신앙심이 더 깊은 자들은 병든 집단이 아니라 건강한 집단에서 나타난다는 결론은 사회적 병리 면에서 발병 비율이 더 낮다는 것이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3) 문화적 명령 실천 훈련 – 이중 언어 구사하기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는 하나님을 믿거나 거듭났다고 주장하지만 공적인 영역에서 기독교적 원칙의 영향력은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대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이 기독교 세계관의 원리를 공적 영역에서 적절한 언로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기독교가 사적 영역은 갈수록 더 종교적인 된 반면에 공적 영역은 더욱 세속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가 공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법을, 즉 복음의 관점을 우리 문화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기술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독교의 정신분열 현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등의 헬라 사상의 영향이 크다.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사상가중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등이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기독교 정신분열현상에 반기를 든 것이며, 프랜시스 쉐프와 C.S.Lewis 등은 그 동안 서구사회에 지배했던 ’계몽주의, 테카르트, 칸트, 무신론자들,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들을 대항하여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문화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세가지 원리를 균형있게 통합해야 한다. 창조된 모든 실재가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왔고 본래부터 선했다는 것, 죄로 인해 모든 것이 손상되고 오염되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되고 회복되고 변혁될 수 있다는 원리를 실제 삶 속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통합할 수 있어야한다.
생물학, 철학적 세계관 분석 및 비판
1) 다윈주의의 종교화
19세기 후반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출판하면서 과학과 종교 간의 조화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다윈주의는 철저히 자연주의적 성격을 띠면서 생명의 기원과 발달을 오직 자연적 원인들에 입각해 설명한다. 과학이 발달된 오늘날에는 다윈주의가 대중문화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이런 현상을 두고 데넷은 다윈주의는 ’거의 모든 전통적 개념을 갉아먹고 그 뒤에 하나의 혁명적 세계관을 남긴다‘고 말한다.
2) 거짓으로 판명되는 다윈주의
그러나 다윈주의자들에게 그 이론에 대한 관찰 가능한 경험론적 증거를 들라고 하면 도망처 버린다. 진화를 지지하는 증거로 가장 널리 인용되는 남미 해안의 갈라파고스 군도에 사는 핀치새(finches)의 변이 현상, 기능 장래를 가진 초파리가 가진 돌발변이의 이론 등은 적자의 생존은 설명할지 모르나 적자의 도래는 설명하지 못한다. 다윈의 경우, 진화는 특정한 이론의 문제라기보다 하나의 철학적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자연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면 어떤 메커니즘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3) 다윈주의의 보편화 현상
다윈주의는 전반적인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위한 과학적 후원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현재 과학의 테두리를 휠씬 넘어서서 공세적으로 홍보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지금 ’보편적인 다윈주의‘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하면서, 그 시대에는 그것이 더 이상 과학적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닐 하나의 포괄적인 세계관이 될 것이라고 한다.
프란시스 쉐퍼는 문화적 분해현상에 대해 ”세계관의 전환으로 인해 초대되었다. 긍극적인 실재는 비인격적 물질 혹은 에너지로서 비인격적 우연에 의해 현재의 형태로 빚어졌다는 사상과 그에 기초한 세계관으로 전환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요즈음 가장 빨리 성정하는 분야 중 하나는 다윈주의를 사회적.문화적 이슈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화심리학‘이라 불리는데, 그들의 주장 중 도덕과 관련되어 ’이기적 유전자‘ 진화가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에게 친절하도록 일종의 악의없는 속임수를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진화심리학‘이 인기를 끌면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진화의 논리에 어떤 자의적 한계도 설정할려고 하지 않는다. 진화의 논리의 일관성을 유지하자면 그 논리를 종교,도덕,정치 등 모든 분야에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다윈주의의 전제를 수용하고 나면,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압력을 받게 되며 문화의 전 영역에 적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진화심리학의 논리는 실제적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즉 아무도 그 이론에 기대어 살수 없다는 말이다. 인류의 보편적 경험이 도덕적 선택의 실재를 확증하고 있으므로,진화심리학자들은 그들의 결정론적 이론에 기초해서 살아갈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보려고 시도할 수는 있으나,이론과 삶 사이의 모습이 너무 커지면 그들은 갑자기 그 이론을 버리고 유전자 세력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선포한다. 이제 다원주의 세계관의 파괴적 영향이 너무 흔해진 나머지 무차별적인 공격에 모든 분야에서 성경적 세계관이 흔들리고 있다는 실정이다.
4) 철학적 다윈주의
19세기 말 다윈주의가 미국의 학자들에게 소개되면서 철학적 실용주의 학파가 형성 되었다. 이 학파의 핵심 가정은 ‘만일 생명이 진화한 것이라면 인간의 정신도 진화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인문과학-심리학,교육학,법학,신학-이 거기에 기초해서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단순한 사상은 미국인의 사고방식 뿐 아니라 사회제도의 구조까지 바꾸어 놓는다.
철학적 실용주의를 개발한 주요 인물은 존듀이(John Dewey),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올리버 웬델 홈즈 2세(Oliver Wendell Holmes, Jr.) 등이다. 이들의 목표는 다윈의 자연주의를 완전한 세계관으로 발전시켜 전통적 종교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한 역사학자는 ”그들은 이전 종교의 핵심 가치들을 일부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대체할 수 있수 있는 풍부하고 훌륭한 자연주의적 변형을 통하여 다윈주의 자체를 하나의 포괄적인 철학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라고 평가했다.
홈즈는 남북전쟁 참전의 경험을 통해 철학적 실용주의를 받아들였고 ‘여러 문명을 이룩한 위대한 원리들은 초월적 진리가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사상들 가운데 생존경쟁에서 이긴 것들’이라고 말했다. 이것 역시 이 사상의 핵심 개념이다. 정신이 물질에 우선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사상이었지만 이들은 물질에 의해 정신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자연에서도 돌연변이가 일어나듯 뇌에서도 돌연변이가 일어나며 이후 자연선택을 통해 현재 우리의 사고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견지하는 개념이나 확신도 생존의 도구에 불과해 진다.
당시 새롭게 등장한 행동주의에서는 외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정신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사상은 철학적 실용주의 자들의 견해, 즉 정신의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을 강화시켰다. 이 과정에 제임스는 ‘진리는 생각의 현금가치’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어떤 생각이 외적인 보상을 제공할 경우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이고 지성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지만 철학적 실용주의자들은 이를 거부한다. “우리의 생각이 실재를 반영하는지 여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옳은 것은 편리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제임스는 다른 실용주의자들에 비해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는데(개인적인 이유로) “과학은 세상을 설명해 주고 종교는 위안을 준다.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가? 당신에게 더 유익한 것이 진리다.”식의 이분법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이것은 “어떤 신념은 유용하면서도 거짓된 것일 수 있다.”며 러셀의 비판을 받는다. “실용주의의 장점은 실용성을 중요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주장이 실용적이라고 해서 진리가 되지는 않는다.”
철학적 실용주의자들이 풀고자 했던 문제는 지식의 분할현상(이분법)이었다. 사실과 가치의 간격을 메우고 지식의 재통합을 이루려 했다. 실용주의 자들은 이 둘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상층부에서는 역사주의1) 를 하층부에서는 도구주의2) 를 취해 합친다. 이 두가지 접근법을 합침으로써, 실용주의자들은 헤겔의 역사주의를 영적과정에서 자연주의적 과정으로 변형시켜 버렸다. 그 결과 사실과 가치를 결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니라 자연주의에 새로운 향을 더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미 다윈이 시도한 일이었다. 안정된 실체란 없고 모든 것이 끊임 없이 변화하는 중에 있다는 면에선 역사주의의 입장이고 진화의 과정은 순전히 유물론적인 체제로만 진행된다는 것은 경험주의의 입장이다. 이전에도 역사주의를 자연주의화 하려는 시도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결정론의 입장을 받아들였다.(칼막스/경제관계에 기초한 법칙이 있다.) 그러나 실용주의자들은 결정론을 배격하고 역사를 완전히 자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 다윈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과정신학운동이 빠른 속도로 주류 신학교에서 성장하고 있다. 퍼스의 영향을 받은 찰수 하트숀(Charles Hartshorne)은 과정신학 창시하면서 하나님과 세계가 끊임없는 변화와 진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범재신론(panentheism, 모든 것이 하나님안에 있다는 사앙)을 가르킨다. 이는 물리적 세계를 하나님의 본체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방출이라고 본다. 과정신학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의 삶과 경험을 형성하는 선택을 내릴 때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경험까지도 형성하게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과 공동창시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와같은 다윈주의 사상은 서구 사회,특히 미국의 사회기관들, 신학, 법학, 교육학, 철학등에서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교사들은 철저하게 다윈주의 사상에 무력해졌고 주류 신학교마서 과정신학의 침투앞에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의식이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
나가면서
저자는 무너진 성경적 세계관의 실태를 고발하고 두 조각난 세계관에 속에서 진리를 거슬리는 문화 속에서 어떻게 각자 주어진 삶의 영역에서 진리를 구현하며 성경적 세계관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성경적 세계관을 정리하고 생물학, 철학적 세계관 특히, 19세기 찰스 다윈이의 진화론을 통해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본서에서 어떻게 해서 복음주의자들은 그토록 쉽게 형이상학적인 겁쟁이가 되는 것일까? 왜 강하고 탄탄한 지적 전통이 없는 것일까? 라고 한탄한다. 그리고 앞으로 전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뒤로 돌아가서 우리가 어디서 잘못나갔는지 지나간 발걸음을 추적하고면서 형이상학적 겁쟁이의 옷을 벗어버리고 승리를 확신하면서 공세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기도와 영적 능력으로 무장하고 오늘날 전투가 벌어지는 현상을 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해야 한다. 그리서도의 주되심과 리더쉽 아래 발벗고 나서야 한다고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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