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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종교 개혁과 과학

by noahegabi 202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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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으로 돌아가자’(ad fontes)라는 문예부흥운동, 즉 르네상스(Renaissance)는 종교개혁을 발생시키된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인문주의자들의 문예부흥운동 영향력 아래 신약성경을 원어인 그리스어로 읽기 시작하면서 성경의 본래적 가르침과 다른 왜곡된 사실을 확인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될 수 있었다. 본서에서는 인문주의의 영향력 아래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정신이 어떻게 유럽 사회를 변화시켰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16, 17세기의 자연과학과 신학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이어서 종교개혁자들이 신학과 과학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고찰한다. 특히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의 과학과 개신교의 관계와 마지막으로 17세기 과학 혁명이 무엇이며, 이에 나타난 개신교의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1. 16세기 이전의 과학의 이해

 

16세기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세상은 불,공기,, ()의 네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을 만물의 근원으로 간주한 밀레투스(Miletus), 모든 것의 근원이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atom)이라 믿었던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자연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중세 스콜라주의 철학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플라톤의 자연철학

플라톤에 의하면 우주는 반신(semi-god)인 데미우르고스(demiurgos)에 의해 조성되었다. 하지만 이 신은 기존에 존재하는 물질들을 활용해서 우주를 창조하는 열등한 신이다. 반면 참된 신에 해당하는 이데아(idea)에게 지배받는 상상속의 신으로 분류한다. 이와같은 이원론의 사고는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고 양자를 서로 반립시키는 이원론적(dualistic)철학의 산물이었다. 이와같은 자신의 철학에 근거해서 참된 신인 이데와와 열등한 신인 데미우르고스로 나누면서 신의 세계와 피조세계를 완전히 구분하고 양자 사이의 차이를 극대화한다. 이와같은 신을 두 종류의 신으로 구분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불완전하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으로 묘사하기에 이른다.

 

아리스토켈레스의 자연철학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의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신을 이원화하는 것을 반대한다. 반면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개념에 동의하면서도 신이 직접 물질세계를 조성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반면 그는 만물의 움직임을 부여하는 최고의 존재라는 차원에서 원동자(prime mover)로 간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 개념은 두가지로 정의된다. 첫째, 만물은 신으로부터 지음 받았다는 합리성이 내재되었다는 형이상학적’(metaphysical) 사고를 의미한다. 둘째, 만물의 보편성에 불구하고 궁극적인 원인을 제공한 최고의 존재에게로 회귀하려는 일종의 회귀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이것은 인간의 경우에서 자신에게 존재를 제공한 궁극적 원인인 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난다고 이해되었다. 이상의 두가지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도 플라톤의 신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기원에 대한 해설을 제공하는 합리적인 신을 뿐이라는 결론을 제공한다.

 

2) 중세의 과학적 사고와 신학

중세 자연철학에 나타난 합리성과 필연성의 개념은 중세 신학에서도 나타나는데,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하면 이신칭의 이론을 신인협동설로 대체한다. 신인협동설은 하나님 자신도 합리적인 원리와 필연성에 얽매여서 이를 초월하지 못한다는 그리스 철학적 주장을 받아들인 이론이다. 이와같은 스콜라주의의 보편론적 사고에 반발하여 의지론과 유명론이 등장한다. 의지론자들은 사물을 규명하고 이를 형성하는 주체의 의지 작용에 의해서 사물의 본질이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유명론자들은 신의 의지 작용이 실제로 일어나서 그의 전능성이 발휘된다면, 사물의 보편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고 이해한다. 유명론자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보편적인 가르침으로서 교리와 윤리적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고였다. 교회는 사실상 성경의 가르침을 절대적이며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삶의 기준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2.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이해

 

종교개혁자들은 앞서 언급한 유명론적 사고와 인문주의적 사고의 결합을 통해서 개혁을 위한 신학적 토대를 마련했는데 대표적인 개혁자로서 루터와 칼빈을 들수 있다.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

루터의 1517년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루터는 중세 스콜라주의의 사고를 잘못된 추론으로 거부했지만, 유명론에 근거해 자연현상은 계시경험에 의해서 설명할려고 했다. 루터는 계시를 전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려져야 비로소 마음속에 성령께서 작용하셔서 이 들려진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같이 계시와 경험 모두를 인간 지식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정했던 루터는 성경을 유명론적 방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시14716-17, 114절등의 주해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루터는 중세 방식의 자연철학자도 아니었고, 근대 이후의 수학적인 사고를 지닌 자연과학자도 아니었지만 다양한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의 실재성과 현실성에 주목하여 자연철학적 사고와 신학적 사고가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 신학적 사고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와같은 사고의 근거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루터의 사고의 핵심이었다.

 

2)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칼빈은 적용이론(theory of accommodation)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시어 인간의 형편에 맞추셔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인간의 차원이나 한계에 적응시켜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택하시고 성경 저자들을 통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으며, 우주가 한 순간에 피조되었다는 과학자들의 오류를 지적한다. 칼빈은 만약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이며 부단한 활동이 없다면, 자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또는 무질서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될것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적용이론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보존되는 자연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중세의 필연적 사고에 근거한 과학적 사고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한다. 칼빈에게 과학은 하나님의 전능성이 작용하고 표현되는 방법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사고를 기초로 삼아 필연적 사고에 얽매인 중세의 과학적 사고를 비판하고,이를 통해서 과학의 발전에 필요한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루터가 과학적 사고는 신학적 사고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양자의 통합을 추구하는 사고를 했다면, 칼빈은 과학적 사고를 더욱 자세하게 고찰하는 가운데 신학과 과학의 독립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사고의 토대를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16세기 후반의 신학과 과학의 관계

 

케플러의 법칙을 발견한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더욱 발전시켜 1596년에 우주의 신비(Mysterium cosmographicum)’,1609년에 신천문학’, 1606년에 예수님의 탄생 연도가 BC 4년이라는 주장을 담은 신성’(De stella nova), 1618년에 타원 궤도의 질서와 이에 내재한 아름다움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는 우주의 조화’(Harmonices mundi), 등의 많은 과학,신학적 저서를 출간하였다. 또한 케플러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종교개혁의 유산에 충실한 참된 신앙이었다. 그는 루터교 신자였지만 성찬론과 그리스도의 인성의 편재성에 관한 교리에서만큼은 루터와 견해를 달리하여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거룩한 성례에서 비롯되는 교훈’(Unterricht vom H.Sacrament des Leibs und Bluts Jesu Christi unsere Erloser)이라는 독일어 문답식 책자를 출간하여 루터와 다른 성찬론을 신봉한다는 이유로 루터파 교회로부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케플러가 이해했던 신학과 과학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케플러가 내세운 화성의 주기에 대한 연구의 근저에는 그가 믿는 하나님의 정확성에 대한 신뢰가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질서 있게 지의셨는데, 이 질서의 개념에 정확성이 포함되었다는 것이었다. 케플러의 과학적 공헌은 탁원한 그의 수학적 능력과 관찰을 중시하는 그의 방법론, 그리고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무한한 인내와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업적이었다. 동시에 케플러의 위대한 발견들은 그의 과학이 근원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뢰를 떠나서는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둘째, 케플러가 수학을 통해 과학을 추구할 때,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를 추구했다. 그는 천문학자로서 우주의 구조속에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조화가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이 조화는 수학적으로 규명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화성의 주기적 공전 운동이 타원형 모양의 운동이라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하나님을 규명하고 이를 필연적 진리로 간주했던 중세의 연역적 추론은 무너지고 새로운 과학을 위한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

당시 자연을 신성시하던 그리스 철학적 사고가 중세에도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었지만, 케플러는 우주를 탐구의 대상으로 파악했고,거기서 비롯된 진리가 비록 완전하거나 완벽하지는 않아도 하나님의 진리임에 분명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케플러는 과학자로서 신학과 과학이 서로 조화되는 한편, 과학이 신학의 영역을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추구될 수 있다는 종교개혁자들의 확신을 계승했다. 케플러의 신앙은 그의 과학적 활동에 지속적인 영감을 불어넣었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과학을 독립적으로 추구하는 과학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4. 17세기 과학 혁명과 개신교

 

1) 17세기 과학혁명의 원동력은 무엇었는가?

16세기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여전히 지적으로 사고하면서 중세인들이 신봉하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방식으로 자연ㅇ르 이해하고 있었다면, 17세기 과학혁명의 토대가 되었던 경험론적이며 유명론적인 사고는 플라톤주의나 신플라톤주의가 추구했던 자연이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적 요소와 목적론적 요소를 부정하게 되었다. 이 두가지 요소가 실험에 기초한 자연과학의 등장을 막은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세계의 실험과학으로서의 자연과학(natural philosophy)과 고대에서 중세까지 지속되어온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사이에 두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 중세의 자연철학은 연역적 추론에 근거해 자연을 논하는 학문인 반면, 자연과학은 귀납적이며 경험적 차원에서 자연을 관찰하고 실험함으로써 그 원리와 법칙을 발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자연에 대한 이해에서 중세의 자연철학은 자연이 지닌 특성을 고찰할 때 지나치게 범신론적 태도를 취한 반면,자연과학은 자연을 고찰할 때 최대한 신과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연을 신으로부터 독립된 개체로 이해할려고 했다. 중세의 자연철학은 자연에서 신에 관한 유비뿐 아니라 신의 모습까지도 찾아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자연을 직접적으로 또한 경험에 기초해서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추론으로 간접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귀납적으로 연구하는 토대가 마련되면서 경험론적이며 귀납적인 자연과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17세기 과학혁명이 어떻게 진행되었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영국의 초기 과학혁명은 이끈 사람은 철학자,정치가,과학자,법률가,웅변가,작가로 알려진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이었다. 그의 당대의 철학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철학은 무가치하므로 더 나은 설계도로 모든 것을 다시 정립하고,올바른 기초위에서 과학,기술,인간의 모든 지식을 총체적으로 재건축해야 한다라고 무용성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1564-1642)1611년에 망원경과 1625작은 눈이라고 불려진 현미경등은 완벽한 구로서 어떤 변화에도 종속되지 않는 완벽체라고 믿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뒤엎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중세인들이 추구했던 방식대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없는 것이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과학혁명이 발생할 수 있는 기반이 자연스럽게 마련되기에 이른다.

17세기 과학혁명을 이끈 베이컨은 과학혁명은 기독교적 진리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620년에 출판된 위대한 부흥에서 다니엘124절의 많은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과학혁명이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한 그의 믿음이 17세기 과학혁명의 중요한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2)기독교 세계관으로서 기계론의 등장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유럽인들은 이 세상에 대하여 유기체적 세계관(organic worldview)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혁명 이후에는 유기체적 세계관이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면서 기계론적 세계관(mechanical worldview)으로 대체되면서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들의 유물론적이며 범신론적 세계관이 배격되고 기독교적 유신론적 견해가 자리잡게 되었다. 로버트 보일(Robert Boyle,1627-1691), 세바스찬 밧소(Sebastian Basso,1573-?)과 같은 과학자들은 이와같은 세계관을 확립하기 위해서 노력한 대표적인 종교개혁적 뿌리를 지닌 개신교도들이었다. 보일(Boyle)은 기계론적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성,지혜,그리고 선하심이라는 속성을 들어내 보였다. 보일은 신학과 과학의 관계가 조화를 이룬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에 근거해 실험에 기초한 과학이 신학과 독립적인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

 

3) 과학자 사회의 결정과 대중화를 통한 과학의 지속적 발전

17세기 유럽에서 자신의 연구결과를 다른 과학자들과 공유하고 서로 협력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과학자들의 사회가 가장 먼저 르네상스 발상지였던 이탈리아에서 링스 아카데미’(Academy of Lynxes)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공식적인 모임은 영국에서 설립된 왕립학회’(The Royal Society)였다. ‘왕립학회는 국가에 의해 정식으로 공인받고 후원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과학자들이 설립한 단체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영국왕립학회를 기초한 베이컨은 독자적인 연구활동보다는 과학사회를 형성하고 연구결과를 상호 교류함으로서 더욱 원활하고 빠르게 과학발전을 이루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 결과로 과학자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확대하고, 대중과 소통하며, 연구활동을 장려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정적 후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같은 노력으로 칼빈이 이해했던 것처럼 신학의 기초 아래 과학이 독립적인 학문으로 발전해가야 한다는 베이컨의 이상아래 17세기 과학 혁명이 역사속에서 구체화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17세기 과학혁명은 개신교의 과학적 사고에 힘입어 과학을 중세가 실현하지 못했던 독립된 학문으로서 현실화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과학도 인류의 삶에 기여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나가면서

 

16세기 대표적인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칼빈은 당대의 자연철학적 사고에 나타난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신학과 과학을 통합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루터는 과학적 사고를 영적 사고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취한 반면 ,칼빈은 과학보다는 신학을 더욱 독립적으로 다루려는 경형을 가지고 있었다. 이같은 종교개혁적 삶의 특징은 16세기 후반 케플러에게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7세기 과학혁명은 영국의 왕립협회에 속한 개신교 신앙을 지닌 청교도들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발전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1910-2003)의 연구 결과가 보여주듯이 그들의 신앙은 17세기 과학혁명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서 종교개혁자들의 말씀 중심의 삶과 개혁을 향한 열정은 개신교 신앙뿐만 아니라 과학의 영역까지 엄청만 변화를 이끌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의 후예인 우리도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실천함으로서 이 사회와 미래의 모든 영역에서 긍정적인 변화의 중심적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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