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들어가기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이른바 ‘고난 받는 종의 노래’(Song of the Suffering Servant)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구약성경의 본문으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이 구절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과 죽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구약의 증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영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관한 예언이라고 생각되는 구약의 한 구절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이사야 53장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수세기 동안 본문 비평적 연구들은 이러한 믿음에 고난 받는 종의 주체의 근원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다양한 해석 이론의 등장으로 이 본문은 오늘날 구약에서 가장 난해하고 논쟁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 되고 있다. 유대전통 중 하나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은 하나님의 구원적인 목적을 이루는 데에 기여하는데 그 이유는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사역을 이스라엘의 소명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면 고난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의 운명에 내재된 원리와 같이 된다. 최윤갑은 이렇게 말했다. 이사야서는 “새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기술한다. 이사야서는 새 창조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를 펼쳐서 보여준다. 고난 받는 종의 사역은 이스라엘의 사역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아닌 새로운 종이, 다른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여러 구원적인 역할을 홀로 한꺼번에 수행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독특한 사역이다.
일부 학자들은 종의 사역과 관련하여 그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는 전통적 견해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이사야 53장을 읽는 방법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이사야 53장의 종은 이스라엘이고 종의 고통은 이스라엘의 소명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그는 종으로 죽었고 이스라엘의 소명을 완수하였다. 둘째, 이사야 53장의 종은 독특한 인물이며 그의 고통은 이스라엘의 소명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종으로써 고통을 받고 죽을 때, 그는 자신의 독특한 사명을 실현하였다.
최근의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53장의 중요한 신학적 관심사들을 분석하고, 그 문제들을 정당한 해석 방법에 기초하여 평가하고 이해해보자.
2. 전후맥락
본문을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맥락이 필요하다. 최윤갑 「구속사로 읽는 이사야」를 통해서 전후맥락을 살펴보자(178-81p). 이사야는 40-55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이사야 40-48장은 우상숭배의 헛됨(사 40:19,22; 41:7‘ 44:10,12,15,17), 처음 것과 나중 것(사 41:22; 42:9,18; 43:9; 46:9 48:3)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 고레스(사 41:2-5. 25-29, 46:11; 48:14-15), 바벨론의 종말과 멸망 예고(사 43:14; 46:1-13; 47:1; 48:14,20)를 중심 주제로 다룬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혹은 “야곱”으로 지칭된다.
반면 이사야 49-55장은 앞서 40-48장에 나타났던 주제들이 급격히 사라지면서 그 신학이나 뉘앙스가 큰 변화를 보인다. 이 장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언약 백성의 귀한(사 49; 55:12-13), 시온의 회복과 새 창조(사49-51장), 하나님 말씀의 확실성과 실효성(사 55:10-11)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언약 백성을 “시온” 혹은 “예루살렘”으로 부른다.
먼저 이사야 40:1-31은 이사야 40-55장의 서론으로 기능한다. 이사야 40:1-11은 바벨론에 잡혀 있는 언약 백성에게 죄 용서와 포로 생활을 선포한다(사 30:1-2). 여기서 제시되는 실실한 종의 고난과 대속적 죽음을 통한 죄 용서 및 고레스 왕을 통한 시온 백성들의 해방은 이사야 40-55장을 이끄는 중심 메시지가 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사역자들을 통해 새 일들을 성취해 가실 때 왕과 용사와 목자로서 구원과 새 창조를 이루어 가신다.
이사야 41:1-44:23은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과 실패를 보여준다. 구속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졌으며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드러내야 하는 거룩한 사명을 받았다(출 19:5-6). 이사야 42:6에 따르면 그들은 열방 가운데 “이방의 빛”, “백성의 언약”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먹게 되어 결국에는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사42:18-19). 물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인애와 성실 가운데 그들은 회복과 새 창조를 누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범죄와 타락의 결과로 바벨론 유수라는 심판의 상황에 놓여야만 한다(사44:1-5; 참조, 사43:1-7).
이사야 44:24-48:22은 하나님이 이방 왕 고레스를 통해 성취하실 사역을 묘사한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고레스를 들어 열국을 다스리며 이스라엘이 포로 상태에서의 해방을 경험하게 하신다(사 44:28-45:8; 46-47장; 참고. 스 1:1-4). “포로 상태에서의 해방”이라는 주제는 이사야 40:1-2과 48:20-22의 “새 출애굽”과 연결되어 이사야 40-48장의 주제를 하나로 통일한다.
이사야 49:1-52:12은 한 신실한 종-메시아와 그의 사역을 통한 시온의 회복 및 구원을 다룬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으로서 감당하지 못했던 사역을 이 종-메시아를 통해 성취하신다. 이 종은 탁월한 교육을 받은 전문가로서 곤고한 자들을 말로 위로하며 하나님께로 인도한다(사50:3). 하지만 이 종은 고난받는 종이다(사50:6-7; 53장). 하나님은 이 종-메시아의 사역을 통해 언약 백성을 다시 회복시켜 황폐했던 시온성을 자녀들이 가득한 곳으로 변화시키신다. 그때 창조주 하나님은 시온의 황폐한 곳들을 에덴처럼, 광야를 야웨의 동산처럼 새롭게 하실 거싱다(사51:3).
이사야 52:13-54:17은 한 종-메시아의 고난과 대속적 죽음, 그 결과 시온이 경험하게 될 구원과 공의를 기술한다. 이사야 49,50장에서 이미 묘사된 이 종의 고난은 이사야 53장에서 최절정에 도달한다. 그는 대속적 고난, 슬픔, 죽음을 통하여 백성의 허물과 죄악을 친히 담당한다(사53:4-5). 이 종은 자신을 하나님께 속건제물로 드림으로써 언약 백성의 죗값을 온전히 치른다. 그 결과 언약 백성은 의롭게 되고 그 공동체를 세워갈 씨(후손)를 보게 된다(사53:10-11). 또한 그의 고난을 통해 시온의 백성은 하나님과 화평의 언약을 세운다(사54:8-10). 이 종은 공동체의 유익과 선을 위해 고결한 희생을 감당하는 한 공동체의 지도자일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죄악과 저주를 홀로 지고 고독한 길을 걸어가신 종-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예견하게 한다.
끝으로 이사야 55:1-13은 이사야 40-55장의 결론이다. 풍성한 연회를 마련하신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그곳으로 초청하신다(사55:1-3). 하나님은 그 연회를 통해 언약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다윗 왕이 누렸던 영광스러운 지위와 특권과 축복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하신다. 다윗에게 허락되었던 새 언약의 축복과 특권이 이제 모든 신실한 종들에게 적용된다(사55:1-5). 이는 “언약의 민주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풍성한 잔치와 연회는 장차 새 공동체가 경험하게 될 운명의 변화와 새 창조를 암시한다. 스위니에 따르면 이 영원한 언약 속에 내포된 구원과 회복, 그리고 그것의 영광스러운 성취는 이사야 56-66장의 중심 주제가 된다.
한편 단락의 마지막 부분인 이사야 55:10-11이 강조하는 말씀의 “확실성”과 “실효성”은 이사야 40:7-8에 나타난 말씀의 “영원성”과 주제적 병치를 이루며 이사야 40-55장에 구조적, 주제적 통일성을 더해준다. 또한 이사야 55:12-13의 새 출애굽 모티프 역시 이사야 40:9-11에 나타난 주제와 대칭을 이루며 이사야 40-55장의 통일성을 강화한다.
3. 넷째 종의 노래에서의 ‘종’의 정체
넷째 종의 노래에서의 ‘종’을 해석하는데 학자들 간의 해석이 상이하다. ‘종’을 ‘이스라엘’ 혹은 ‘경건한 소수’의 공동체로 보는 주장과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입장이 있다. 무엇이 타당한지 살펴보자.
1) 이스라엘
고대 유대 랍비들은 본문에서 복수형 두 단어, למו ("그들에게", 8절), במתיו ("그의 죽음들 안에")가 개인적인 종이 아니라 집합적인 종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논지인 복수형의 두 단어 중 'למו'는 단수형의 접미사로 취급할 수 있고, 'במתיו' 역시 복수형 'במתיו'를 여러 역본의 지지를 받는 단수형 ' בּמותו'로 수정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부디(Karl Budde)는 논하기를 둘째 종의 노래(사 49:1-6)에서 ‘종’ 이 선명히 ‘이스라엘’ 로 지칭되었기 때문에(사49:3) 다른 종의 노래들의 종’ 도 이스라엘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이사야의 모든 종이 개인적이건 집합적이건 같은 인물/ 공동체를 지칭한다는 전제가 입증되어야 한다. 단지 둘째 종의 노래에서 종이(사49:3) 선명히 이스라엘 지칭하기 때문에 넷째 종의 노래에서의 종을 이스라엘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는 타당하지 않다.
슈스터 (C. G. Schuster)는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을 이스라엘의 운명에 비유하여(allegory) 집합적인 존재로 본다.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을 이스라엘로 비유하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전후 맥락의 넷째 종의 노래의 내용과 충돌한다. 넷째 종의 노래에서 ‘우리’ 는 이스라엘을 지칭하며 이 ‘우리’는 종의 고통을 통하여 평화를 얻는다. 만약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이 집합적 존재인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본문에서 고통 받는 이와 그 고통으로 인해 혜택을 입는 존재가 같게 됨으로서 그 해석은 본문에서 납득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양으로 비유된 구약성경의 다른 본문들, 예를 들어 에스겔 37장과 시편44:22에 비추어 보면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을 집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넷째 종의 노래의 종과 에스겔 37장,시편 44:22의 종의 비교는 섬세하지 못한 비교에 불과하다. 에스겔 37장에서 이스라엘의 고통은 그들의 죄로 인한 것인 반면 넷째 종의 노래에서의 고통은 무죄한 종의 고통이다. 또한 시편 44:22의 고통은 하나님을 위한 고통인 반면 넷째 노래의 고통은 ‘우리’ 즉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고통이다.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을 이스라엘로 보았을 때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종의 정체를 이스라엘로 판명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이스라엘의 경건한 소수
파울루스(H. E. G. Paulus)는 넷째 종의 노래에서 종의 정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그의 이론을 제안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전체를 여호와 예배자로 볼 수 없다. 단지 여기서는 이스라엘 민족 중 순전하게 여호와를 예배하는 일부가 집합적으로 언급된 것이다. 그들이 나머지 유대 인들 때문에 고통 당했다. 소수의 유대 인들이 나머지 유대 인들과 함께 고통 당하고 그들을 위해 고통 당한 것이다."
분명히 이 이론은 이스라엘 전체를 종으로 간주하는데 있어서의 큰 어려움,즉 앞에서 살펴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고통 받는다는 모순을 어느 정도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파울루스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그룹과 불순종하는 그룹으로 나누고 순종한 이스라엘의 그룹이 불순종한 이스라엘 그룹을 위해 고통을 받았다고 상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본문에 비추어 봤을 때 매우 임의적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넷째 종의 노래의 본문에서는 두 그룹을 상정한 어떠한 흔적도 없다. 설령 한 그룹 이 ‘종’ 이고 다른 한 그룹이 ‘나의 백성’(8절), ‘많은 이들’(52:14; 53:12) 이라면 왜 저자가 한 그룹은 단수로 표현하고 다른 한 그룹은 복수로 표현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또한 포로기 상황에서의 고통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 중 한 그룹은 고통을 받고 한 그룹은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가정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3) 메시야
이사야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을 메시야로 간주한 고대의 대표적인 유대문서는 요나단의 탈굼이다. 요나단의 탈굼의 이사야 52:13은 “보라,나의 종,메시야 …”로 시작한다. 이후 유대 공동체의 탈무드와 미드라쉬에서 이사야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을 간헐적으로 메시야로 보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유대교 전통에서는 그 종을 집합적 이스라엘로 해석하기를 선호하였다.이는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을 메시야로 해석하고 그 메시야를 예수와 연결하는 기독교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물론 기독교 안에서는 18세기 이전까지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을 메시야로 보는 견해가 정설로 인정되어왔고 그 입장의 근거는 넷째 종의 노래에서의 종의 묘사와 신약성경에서 그려진 예수의 묘사가 합치 된다는 것이었다(벧전 2:21-25; 행8:30-35). 즉,기독교 내에서는 교리적인 고백과 연결하여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을 정체를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을 메시야로 보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넷째 종의 노래에서의 고난 받는 종의 묘사와 다윗의 후손으로서 왕으로 오는 다윗 메시야(The Davidic Messiah)의 묘사 사이의 긴장이다. 왕으로 오는 다윗 메시야 상(image)은 분명 우세한 메시야 상(image)이다. 하지만 이 우세한 메시야 상으로 인해 다른 메시야 상을 너무 쉽게 거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다윗 메시야 상이 메시야 상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윗 메시야 상을 메시야 상과 동일시하는 편향된 경향 때문에 로울리는 이사야의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을 미래의 종말론적 종으로 간주하나 메시야적 (messianic) 종이라는 표현을 피하기도 한다. 다윗 메시야 상을 메시야 상의 전부라는 전제 내지 편견에서 벗어날 때 넷째 종의 노래의 고난 받는 종을 메시야 상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고난 받는 종이기 때문에 메시야를 지칭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오류에서 벗어 날 수 있다. 고난 받는 메시야 상은 왕으로 오시는 다윗 메시야 상과 모순되는 관계에 있지 않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넷째 종의 노래의 본문 자체가 이 보완적인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이 노래 안에는 고난 받는 종의 상(사 53:1-9)과 더불어 왕의 승리와 존엄의 상이 노래의 처음과 끝의 신탁부분(사 52:13-15;53:10-12)에 함께 나타난다.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을 메시야로 보는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이 위의 제안과 같이 해소될 때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의 정체는 그의 고통을 통해 그의 백성을 구원하는 메시야로 볼 수 있다.
4. 희생제와 출애굽기
본 장에서는 종의 고통이 이스라엘의 소명과 동일시되기 어려운 이유는 종의 임무가 레위기에 나타나는 희생제와 출애굽기 구원의 모티브와 유사함을 통해서 53장의 주체가 메시야의 타당함을 밝혀 보겠다. 희생제와 출애굽기 구원의 용어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이 되어있다.
네 번째 노래는 그 종의 임무를 레위 희생 제사와 출애굽 사건과 연관된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구성되는 사건이므로, 구성된 이스라엘이 수행 할 임무가 아니다(출19:4-6). 희생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이미 불결하기 때문에 그들은 희생이 필요한 집단이며, 회복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가 아니다. 따라서 네 번째 노래가 종의 일을 나타내는 한 희생과 출애굽의 관점에서 종의 일은 이스라엘의 소명과 더 이상 동일하지 않다.
네 번째 노래의 희생 제사 개념은 10-11절에서 관찰된다. 여기서 종의 고통과 그 업적은 속건제물(10절), 많은 사람을 의롭게(11절)에서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레위 희생 제도의 전체 이론적 근거, 즉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제거하는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1절의 동사 “סבל”의 기본 의미는 물건이나 짐을 싣는 것처럼 "짊어지고 간다"이다. 이 동사에서 볼 수 있듯이 “סבל”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종이 백성의 무거운 죄 짐을 친히 짊어지고 가는 모습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죄악과 죄의 객관화는 육체의 불순물처럼 죄인과 분리 될 수 있는 실체로서 육체의 불순물이 사람을 더럽히고 먼 곳에서 성소를 침투하는 것처럼 죄도 죄인을 죄인으로 만들고 동시에 성소를 죄로 물드린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의 죄는 그들에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성소에 도달하여 거기에 오염 물질로 남아있는다.
죄인에게 남아있는 죄는 반드시 회개의 과정에 의해 제거 될 수 있다. 속죄의 과정, 즉, 희생양을 포함하는 제사의 속죄 절차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를 제거해야한다(레16:20-22). 특히 속죄일에 죄를 제거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희생양에게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악과 그들의 모든 범죄와 그들의 모든 죄에 대해 “고백”하고 그 모든 것을 광야로 데려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담는 희생양의 역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종의 일과 성소에서 죄를 제거하는 일의 이러한 연관성은 이사야 40-55의 맥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종의 속죄제물은 이스라엘이 궁극적으로 자신이 영적으로 병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라는 병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예루살렘 밖에서 살게된 주된 요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제사장 왕국으로 다시 살기 위해서는 속죄제를 받아야한다. 그러므로 그 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죄를 제거했을 뿐 아니라 그의 어린 양과 같은 죽음이 나타내는 대로 자신을 속죄제물로 바침으로 이스라엘의 죄의 억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
회복의 모티브는 출애굽을 떠올리게 한다. 출애굽은 모세와 아론의 파라오의 대결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가하신 사건 유월절, 홍해를 건너게 하심, 광야 생활, 언약을 맺음(출7-19) 이지만, 이스라엘의 새 출애굽의 경우 이 모든 일을 종의 고통과 죽음의 단일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출애굽 하였지만 우상 숭배의 죄로 인해 여전히 실패하였던 이스라엘은 종의 사역으로 회복된 예루살렘-시온을 선포한다.
이사야 53 장의 종의 고통받는 사역은 이스라엘 국가나 이스라엘 내의 어떤 기존 범주의 사람들의 역할로 일치 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가 치유하고, 죄를 제거하고, 저주가 소진되고, 언약을 갱신할 수 없다. 고통과 죽음을 견디는 것, 이것은 네 번째 노래의 종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53 장에서 메시야만이 모든 구속 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종임을 의미한다.
5. 나가기
본문에서는 전후맥락을 살피고, 넷째 종의 노래의 종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여러 해석 중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다른 해석들 보다 종을 메시야로 보는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고난 받는 종의 역할을 통해서 그 타당성을 보완하였다.
고난 받는 종의 사역은 이스라엘의 사역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사역으로서 이스라엘이 아닌 새로운 종이, 다른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여러 구원적인 역할을 홀로 한꺼번에 수행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독특한 사역이다. 이 독특한 사역을 감당한 종이 예수그리스도임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이 구원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그리스도의 독특한 고난 사역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지, 고난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내재된 원리가 되어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구원 적으로 효과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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